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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요민사판례 2판 머리말
    저술 2017. 6. 29. 16:22

    법률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판례를 읽는다. 학생, 교수, 변호사, 판사, 검사는 물론 판례를 형성하는 주체라고 할 수 있는 대법원 종사자들도 판례를 읽어야 한다. 특히 매달 두 번씩 발간되는 판례공보는 법조 종사자들에게 다양하고 꾸준한 읽을거리가 되는 동시에 실제 소송을 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므로 판례를 읽으면서 예전에 어떤 내용의 판례가 있었다는 개략적인 것이라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편저자의 경우, 대법원 판례를 읽으며 상반된 감정(ambivalent feelings)을 갖게 된다. 대법원이 어떤 곳인가? 대법원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최고법원으로 법령해석에 관한 최종적 해석기관이고, 그곳에서 내려진 판단은 하급심을 구속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민사소송의 경우 강제집행의 기초가 되고, 형사재판의 경우 형집행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민사재판에서 잘못 판단되면 어떤 사람은 평생 번 재산을 일순간에 잃을 수 있고, 형사재판에서 잘못 판단되면 어떤 사람은 죄를 짓고도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반면 다른 사람은 무고한 자로서 형벌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토록 사법기관의 판단은 우리 국민의 일상생활에 직접적인 손길을 뻗치고 있는 것이다.


    흔히 사법부는 공정성을 생명으로 하고 있고, 판∙검사들은 많이 공부하고 엄격한 자격심사를 거쳐 선발되어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므로 공정할 뿐 아니라 예리하게 사건의 실체를 파악할 것으로 기대한다. 특히 평생 한 번 재판을 할까 말까 하는 사람들일수록 사법부에 대한 막연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의 소박한 생각은, 재판은 한 번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므로, 설사 1심에서 간과된 점이나 오판이 있더라도 2심에서는 그 잘못이 시정될 것이고, 극히 예외적으로 2심에서도 진실이 밝혀지지 못하면 적어도 최종심인 대법원에서는 밝혀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흔한 경우는 아니나 이런 경우가 실제로 있다. 1심, 2심에서 판판이 깨지고도 그 주장을 굽히지 않고(with unflinching determination) 대법원까지 가서 마침내 원심판결이 잘못이라는 판결을 받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매우 극적이다. 패색이 완연한 사건을 최종심에서 뒤집는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이미 들어간 변호사 비용은 물론이거니와 심급을 올라갈수록 인지대는 1.5배 2배로 더 들고, 패소 확정되면 상대방 소송비용까지 물어줘야 할 위험, 그것 보라며 내가 처음부터 말리지 않았느냐는 가까운 사람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대법원의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이러한 사건의 대법원 판결을 보면 지극히 당연한 법리를 선언한 것이거나 종전의 판례를 재확인하고 있는 것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 당연한 판결을 얻기 위해 견뎌온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며 흥분된 가슴을 쓸어내리지만, 한편 대법원까지 가서야 겨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허탈감에 자신도 모르게 불평이 튀어나올 만도 하다.


    반면, 재판을 실제로 경험하고 또 많이 경험해 본 사람일수록 재판에 대한 신뢰는 떨어지는 느낌이다. 이와 관련 서울지방변호사회는 2014. 9. 17. 보도자료를 통해 대법원의 상고법원 설치 방안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설문조사에 나타난 변호사들의 답변은 재판 받는 자의 심정을 아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예컨대, “대법관수 증원이 당연히 필요하고, 재판을 수도 없이 받아 본 소송대리인으로서 2심까지의 판결에 대하여 변호사인 나도 수긍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이를 일반인에게 수긍하라고 하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심리불속행제도는 하급심판결이 기본적으로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법원 자체의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잘못된 판결은 하급심 판사의 능력 부족이나 권위적인 판단에 의한 경우도 다반사여서 이는 하급심 판사 증원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기본적 문제가 있다. 판사 자체의 자질향상은 물론, 법원 스스로 자신의 판단이 잘못될 수 있다는 겸허한 자세에서 재판을 바라보고, 자신들의 재판이 소액의 민사재판인 경우에도 실제로 국민 개개인의 평생의 삶의 방향을 결정지을 수 있다고 하는 진중한 자세를 가지고 재판에 임해야 할 것이다.”, “현재 상고심은 상고이유서를 읽기는 하는지도 의심스러운 경우가 있다. 하급심 재판의 충실화를 위한 판사 인원 증가 및 대법관 증가가 모두 필요하다.”라는 진지한 응답이 있는가 하면, “현재의 대법원 상고제도는 순 엉터리입니다. 뭔가 대대적인 개혁을 해야 합니다.”라는 재치있는 답변도 있다.


    미국연방대법원을 소개한 간단한 비디오 클립에 이런 설명이 나온다.

    "Their[The court's] legitimacy is in the Constitution, but their power rests on public faith in their independence and impartiality."


    위와 같은 설명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그대로 타당할 것이다. 법원의 힘은 법원 판단에 대한 국민의 믿음과 신뢰, 즉 법원 판단의 정당성에 대한 국민들의 믿음과 법원이 내린 결정을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자세로부터 도출된다. 법원의 <rhetorical authority> 또는 <the credible persuasiveness of its judgment>가 결여되면 법원의 판단은 무력하게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하게 되는 것이다.[각주:1] 나아가 법원의 <rhetorical authority>는 법원이 강제력이 아닌 설득력으로 국민들의 복종(compliance)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에 진정한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국민과 법원의 관계는 법원이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있는가 하는 것과 국민이 법원 판단을 존중할 것인가 하는 것의 상호관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국민의 신뢰는 사법부 존립의 근거가 되는 것인 반면, 이러한 국민의 믿음과 신뢰를 지켜나가는 것은 그들의 의무인 것이다.


    이러한 논의에 비추어 볼 때, 우리 대법원은 논증의 힘으로 국민을 설득하려는 노력이 매우 부족하다. 대법원은 어느 누구의 이야기도 듣지 않는다. 대법원 판결에는 그 판단의 근거로 주석을 달지도 않는다. 판결이 선고된 이후 대법원판례해설이라는 간행물을 통하여 이에 관한 그들의 관점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대법원은 판결을 전부 공개하지도 않는다. 대법원에서 어떻게 사건이 처리되고 있는지 또 어떤 사건은 심리불속행으로 솎아지는지 아무도 모른다.

    대법원의 업무부담 가중과 관련하여, 일부에서는 미국 연방대법원이 한 해 100건이 안 되는 사건을 처리한다는 점을 들어 우리도 대법원이 정책법원으로서의 기능할 수 있도록 상고심의 관할을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주장의 당부를 논하기 전에 양국의 차이점을 우선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미국 연방대법원은 9명의 대법관이 각 3-5인 정도의 소수의 인원의 도움을 받아 의견서를 작성한다. 연방대법원의 로클럭은 법과대학을 갓 졸업한 사람들이고, 매년 바뀐다. 미국 대법관들은 대법원의 심사를 청원하는 연간 약 8천여 건의 사건을 검토하여 상고를 허가할 것이지 여부를 결정하고,[각주:2] 일정이 잡힌 공개 구두변론사건의 기록을 검토해야 하고, 구두변론이 끝난 뒤 내부평의에 참석하여 의견을 교환하고, 여기서 다수의견의 방향이 정해지면 그 대표 집필자를 정해 의견서를 작성하고, 교환하고, 수정본을 또 돌리고, 이 과정에서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이 바뀌기도 한다.[각주:3] 요컨대, 8천여 건의 상고허가장을 검토하는 동시에, 일정이 잡힌 사건의 구두변론을 준비하여 그 일정에 따라 변론에 참여하며,[각주:4] 이와 병행하여 구두변론이 끝난 종전 다수 사건들의 의견서를 작성 회람 수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우리 대법원은 100명이 넘는 대규모 재판연구관들이 일하고 있고, 이들은 대략 판사 경력 10년 정도의 40대 초중반의 판사들이다. 대법관 별로 각 3인의 전담 연구관 외에 민사조, 상사조와 같은 무리에 속한 공동 연구관이 있다. 우리 대법원은 구두변론의 일정이 전혀 없다. 키코사건의 경우와 같이 공개변론이 이루어진 예가 없지 아니하나 이러한 예는 대법원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뿐더러 공개변론을 통하여 말로 서로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질문하는 토론의 장이라기보다 원 피고, 참고인(교수) 각자 자신이 준비한 서면을 읽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수준의 변론이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구두변론의 경험도 쌓이지 않은 상황에서 전국민 공개 방송을 생중계하였으니 이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대법원의 경우, 심리불속행 사유는 법에 규정되어 있기는 하나 실제로 그 결정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하는지 대법원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모른다. 판결문에 표기된 주심의 표시는 그 사건을 주심인 대법관의 방에서 작성된 문건임을 알 수 있을 뿐, 같은 판결문에 표시된 다른 대법관이 그 사건의 기록을 보고 판결서에 서명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대법관은 각자 그 생긴 모습이 다른 것처럼, 법률에 대한 이해∙사건을 바라보는 관점∙가치관∙표현방법 등이 다양할 수밖에 없을 것인데, 기이하게도 우리 대법원은 주심이 누구이든 매우 균질적인 판결을 생산해내고 있다. 이는 대법관 개개인의 지혜와 판단력에 의해 판결이 형성된다기보다 민사조 상사조 연구관들의 성과물이라고 짐작되는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100명이 넘는 연구관의 숫자가 이를 웅변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대법원의 판결은 너무 간략해서 그 뜻을 분명히 알 수 없는 것이 매우 많고, 판결이 너무 많다보니 폐기해야 할 판결들이 다른 취지의 판례로서 자리 잡고 있으며, 가장 큰 문제는 원칙을 정립하지 않은 상황에서 판례를 쏟아내다 보니 판결 상호간에 모순되는 것은 물론 현실적인 문제해결도 하지 못하는 판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본질적으로 미국 연방대법원은 연방헌법의 해석기관인 점에서 우리 대법원과는 그 위상과 기능이 전혀 다르다. 요컨대, 단순한 사건처리 숫자상의 비교는 무의미하고, 사건에 대한 진지도∙논의의 깊이 등을 고려하면 더욱 비교불가이다.


    생각건대, 대법원 판례의 형성, 변경은 대법원에 달려 있다. 또한 대법원 판례의 종국적(final and irrevocable)이다. 설령 선고 직후 그 판단이 잘못된 것을 대법원 스스로 인식했다 하더라도, 더 이상 재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한편, 사법의 속성상 구체적 사건을 떠나 판례를 변경할 수도 없다.


    대법원의 판단이 종국적인 것은 대법원이 오류를 범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 판단이 종국적인 한도에서 오류가 아닌 것으로 취급될 뿐이다. 대법원에겐 이러한 인식이 절실하다. 대법원은 처밀리는 사건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건의 대부분을 불속행 기각할 것이 아니고, 하급심의 역량 강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도 하급법원에는 자신의 말 한마디로 천지를 호령하는 재판장들이 조정을 강요하고, 이에 불응하면 여봐란듯이 불리한 판결을 하고, 이유도 달지 않은 판결을 쏟아내고 있다. 대법원은, inter alia, 재임용심사를 엄격히 하여 권위만 앞세우고 판결서에는 이유 기재가 없는 무익한 자들의 재임용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국민의 비판에 겸허하게 귀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사법기관이 우리 국민의 일상생활에 끼치는 영향은 너무나 커서 설득이 아닌 억압과 묵살로써는 분쟁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국민을 상식과 논리로써 설득하지 못하는 재판은 국민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 낼 수도 없으며, 결국 외면과 원망의 대상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1. Ryan A. Malphurs, Rhetoric and Discourse in Supreme Court Oral Arguments, p.184 [본문으로]
    2. 대법관 9인 중 4인 이상이 찬성으로; rule of four [본문으로]
    3. Warren E. Burger 당시의 대법원의 모습을 그린 Bob Woodward and Scott Armstrong의 「The Brethren: Inside the Supreme Court」 참조 [본문으로]
    4. 구두변론이 재미있는 것은 그 음성파일과 녹취속기록이 일반에 공개되기 때문에, 사건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질문을 할 수도 없고, 변론에 참여할 수 없다. 엉뚱한 질문을 했다가는 여론의 뭇매를 피할 수 없다. 인류 문명이 유지되는 한 그 기록은 영원히 보존될 것이므로 그러한 공개 자체가 강력한 사법권 통제수단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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